수 십 년만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두주 전,
갑작스런 모친의 죽음으로 황망 중에 장례식을 치르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멍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이제야 꼭 꿈같았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10년 전(2007.12.) 부친(박현갑 장로)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소천한 이후에도
모친은 홀로 고향집을 지키며 비교적 건강히 생활해 오셨습니다.
모친은 깔끔하고 정갈한 편이어서 낯선 곳에 지내기를 불편해 하시고
또한 신심이 깊어 주일성수에 철저하시고 늘 새벽기도를 해 오신 분이라
고향을 떠나 오랜 시간을 지내는 것을 불편해 하셨습니다.
심지어 큰 아들인 제가 사는 부산에 오셔서 며칠 묵으시라 권해도
친구도 없고 교회도 낯설다며 이틀밤을 넘기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몇몇 질환이 발병해 수술을 위해 몇 주씩 저희 집에 묵다가
최근에는 허리를 다쳐 걷기가 힘들어지면서 몇 달간 저희 부산집에 기거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고향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기시다
증상이 조금 호전되자 걸음이 완전치 못한데도 3월 말에 고향으로 되돌아가셨습니다.
다행히 걱정과는 달리 어머니는 진주 집에서 홀로 지내면서도
불편한 허리와 걸음걸이가 많이 좋아지셨는데,
이번 무더위에 열사병으로 인해 갑작스런 하나님을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좀 더 자주 찾아뵙고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불효가 천추의 한으로 남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경남 남해의 전통 있는 기독교 집안 출신들로
결혼 후 아버지가 직업군인에 종사하셨기에 전국을 다니시다가
1968년 7월 아버지의 군 제대와 함께 진주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가족이 진주에 와서 진주제일교회를 섬긴 지는 올해로 꼭 50년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진주 고향집은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3년에 매입해
이후 계속 같은 장소에서 살아왔기에 올해로 꼭 45년이 됩니다.
진주 정착 이후, 어머니는 학생 교복을 주로 제작하는 양장점을 운영하셨고
아버지는 중등학교 교련선생으로 근무하셔서
저희 가정은 물심양면에서 큰 어려움 없이 다복하게 지냈습니다.
더욱이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청교도적인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켜 오셨고
나누고 베푸는데도 인색하지 않으셔서 이웃에 좋은 인심을 얻으며 살아오셨습니다.
이번 장례식에도 이웃 동네 분들이 많이 빈소를 찾아오셔서 안타까워하며 함께 슬픔을 나눴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내내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연을 만나고도 몰라보고
어떤 사람은 인연인줄 알면서도 놓치고
어떤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저희 부모님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또한 많은 인연을 만들어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나누고 베푸는데 즐거워하시고 크거나 작거나 간에 받은 것을 잊지 않고 보답했습니다.
특히 모태신앙으로 물려받은 기독교 복음은 두 분을 돈독한 신앙인으로 만드셨고
그 신앙이 인연이 되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져
일생을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성숙한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는 10년 전 심장마비로, 어머니는 이번에 열사병으로,
두 분 모두 단 한 시간의 병원 신세도 지지 않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셨지만
그 전날까지 일상적인 일을 그대로 하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은 최근 들어, 어머니는 자는 동안 조용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본인을 위한 기도 제목이라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더구나 너무 부하게도 마시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게 해 달라던 성경 속의 <아굴의 기도>처럼,
자신의 주검이 너무 일찍 발견되지도 말고 너무 늦게 발견되지도 말았으면 하셨는데
꼭 기도대로 어머니는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참, 윤 권사답게 깨끗하게 가셨네.”라던 어느 친지분의 말씀이
어떤 애도사보다도 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해는
진주제일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남해고속도로 확장 공사로 교회묘지가 이전되면서
현재는 진주시립 납골묘원인 안락공원에 잠시 안치되어 있습니다.
부친은 군대 장기 복무로 국가가 관리하는 ‘호국원’에 부부가 함께 안치될 자격이 있어
최근에 조성된 ‘산청 호국원’으로 먼저 이장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청 호국원은 아직 교통편이 좋지 않아 어머니가 한 번씩 찾아보기가 어려워
이장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별세하게 되어 어머니의 유해도 잠시 안락공원에 안치하게 되었습니다.
안락공원은 현재 부부단은 없고 개인단만 남아 있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따로 떨어져 안치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버지 유해가 안치된 납골묘 옆의 개인단이 다른 곳으로 이장해 나가 비어 있었습니다 .
진주시립인 안락공원 납골묘는 안치 위치를 선택적으로 본인들이 지정할 수 없고 순서에 따라 안치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납골묘는 남이 사용하였던 자리는 꺼리는 경향이 있어
다른 곳으로 이장해 나간 빈 곳은 오랫동안 빈 상태로 남게 되고 가끔 무연고자에 의해 채워지곤 합니다.
그래서 조만간 산청 호국원으로 이장하게 될 어머니의 유해를 새 개인단에 잠시 사용하고는
헌 자리로 만들기보다는 이장되고 나간 빈자리에 모셔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아버지 납골단 옆의 빈자리는 어머니를 위해 미리 예비 된 귀한 자리로 여겨졌습니다 .
이런 연유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해는 부부단처럼 나란히 모시게 되었습니다.
안락공원에는 수천기의 개인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우연히 거의 10년의 격차를 두고
두 부부 유골함이 나란히 안치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확률로는 거의 0에 가까운 기적 같은 일일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에 반응하는 신앙인의 간절함이
이런 기적을 만들고 인연을 살려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에게 큰 위안이 되어 가슴 가득한 슬픔을 조금씩 밖으로 밀어내주었습니다.
늙은 부모는 늘 자식을 그리워하며 자식들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부모가 모두 떠난 지금
그리움은 자식의 몫이 되었고 빈자리는 자식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자식은 부모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부모를 그리워하고
부모가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렇게 늙어갈 것입니다.
위 사진은
이번 장례식을 마치고 고향집을 정리하다 발견한 것으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경남 남해군의 여름 주일학교 교사 강습회 때 사진입니다.
저희 부모의 결혼전 사진으로 두 분이 함께 찍힌 유일한 사진입니다.
제일 뒷줄 왼쪽에서 3번째가 저희 부친이시고, 제일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이번에 소천하신 저희 모친입니다.
부친은 이후 군대징집명령을 받고 입대하셨는데
당시 함께 입대한 고향 동기들은 전쟁 중 모두 사망했다고 합니다.
부친은 어짜피 전쟁에 나갈 바에는 장교라도 되어서 죽자며 장교로 지원하셨는데
장교 훈련은 사병보다 길고 또 특별히 차출되어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는 덕분에
휴전이 된 후에야 임관받아 부대로 발령을 받게되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후 1955년 10월 12일 같은 장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끝으로
지난 50년간 한결같이
저희 부모님과 진주제일교회를 섬기며 사랑으로 함께 해온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깊은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유족을 대표해
고 박현갑 장로와 고 윤금선 권사의 장남 박환규 장로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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